사방은 고요한데 간간히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과 어쩌다 정적을 깨는건 동네 어느 집 개짓는 소리가 전부였다. 발 아래 지천으로 올라온 냉이가 도시여자인 나를 홀려주는 듯 여기를 캐고나면 저기에서 내밀며 끝도없이 밭을 헤매이게 한다. 이모들은 제사음식 준비하느라 바쁠텐데 한가롭게 들판에서 봄나물을 캐며 자연과 호흡하고 있다. 산짐승이 동네 앞 밭에까지 내려 오는지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다. 온갖 새소리 바람을 타고 내 귓전에 와닺고 산은 울음을 토해내듯 웅~하고 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무서워 진다,
유년시절 그 밭에서 오이며 고추를 따고 어머니가 군것질 거리로 심어준 토마토를 따기도 했던 곳인데. 그러고보면 어느새 나도 자연을 벗으나 도시에 길들여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참을 엎드려 냉이를 캐다가 잠시 동네를 쳐다본다. 옛날 그대로 가지런한 동네는 정감어린 아름다운 풍경이다. 저기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아무 미련없이 떠났던 작은 아이는 중년이 되어서야 그 의미를 떠올려본다. 온갖 생각들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앞집 임이, 추자, 점자, 영자, 그리고 일찍이도 유명을 달리한 미스코리아감이라며 정말 예뻣던 석순이, 모두들 어디에서 잘 살고 있는지 내가 하나도 보고싶지 않은지 연락도 없다.
놀 때는 늘 나의 리드를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하자고하는대로 같이 놀아주던 너무나 그리운 내 친구들, 소먹이러 가는 그들을 따라가고 싶어 어머니께 거짓말하고 따라가 머루며 다래를 따먹으며 시간가는줄 모르다 해가 지고서야 소를 몰아 돌아오는 아이들이랑 같이 산을 내려왔다가 어머니께 혼이 났던 추억이 수채화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외삼촌이 외할머니 산소를 다녀오시다가 냉이를 캐는 나를 보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나를 안타까워 하신다. 외삼촌은 나를 제대로 공부를 시켰다면 사회에서 지금 쯤은 한 자리쯤 차지하고 살 영특한 아이였는데 어른들이 잘못했다며 참 많은 후회를 하셨단다. 그 당시엔 동생이 공부를 해야했고 아버지의 부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 다 내려 놓으시라고 위로해 드려야 했다.
밭고랑에 우두커니 앉아 동네 집집마다 들려서 지난 날 추억을 더듬어 본다. 지금은 내 기억속에 있던 어른들이 고인이 되시고 그나마 계신 분들은 얼마남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 길목에서 불편한 육신을 이끌고 농사를 짓느라 손톱이 다 닳았다. 내가 떠나고 두 번째 방문인데 모두들 아스라히 기억하며 안아주었다. "너는 어릴 때도 예쁘더니 지금도 참 예쁘고 곱다"라며 손을 놓지 못하셨다. 우리 동네로 시집온 새색시였던 아지매들은 어느새 할머니가 되었고 그 때 할머니들은 고인이 되신지 오래되었다고 하신다. 세월이 무상타고 누가 그러더니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서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외삼촌과 다정하게 논두렁을 따라 마을로 돌아 오면서 피어오르는 저녘 연기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아직도 온돌방엔 비싼 석유대신 땔감으로 군불을 지핀다고 했다. 외삼촌을 집으로 가시고 혼자 동네앞 개울을 따라 나있는 개울 옆 길에서 내 유년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낮은 길은 몇년전 태풍으로 유실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있던 바위와 돌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이 대신하고 콘크리트로 높게 둑을 쌓아 길을 만들어 개울이 예전같지 않아 낮설어 보였다.
옛날 빨래를 하던 곳, 꼬맹이들이 멱을 감던곳, 물을 길러 먹던 우물등 동네 한 바뀌를 여유롭게 걸으며 옛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릴적엔 내 앞에 보이는 사물이 그렇게 컸는데 어른이 된 지금 그 것들이 옹색하고 작아 보인다. 동네 아이들이 멱을 감을 때 다이빙을 하던 높고 큰 소는 높이도 나즈막하고 깊이도 바위와 돌이 채워져 예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개울가 그 곳 바위 위에도 작은 돌맹이에도 내 추억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내 모태 고향이기에 더 애틋한지 모른다. 자꾸만 안기고 싶은 님의 품처럼 그 곳에서 안주하고 싶어졌다.
저녁엔 이웃에 살고 있는 외가친척들이 다 모였다. 외할아버지의 제삿날이기에 모여서 추억하며 지난 시간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자정이 되자 준비한 음식으로 정성껏 제사를 올리고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눠먹었다.
이모들과 어머니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밤새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곁에 누워서 자매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얕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짐승 우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동물학자라면 그 울음 소리만으로 식별이 가능할텐데 온갖 울음소리를 들기만 할 뿐 대체 어떤 짐승의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에 별은 총총하고 개짓는 소리와 짐승들이 우는 소리는 무서웠다. 안금은 깊은 산골이라 아무래도 산짐승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큰 외삼촌이 얘기하셨다. 산짐승 우는 소리에 잠을 설치고 산새가 지저기며 아침을 깨웠다.
산골의 아침은 맑은 공기와 포근한 봄의 기운이 말 할 수 없이 상쾌하고 부드러웠다.
골짜기 암반에서 흘러 나오는 맑은 물은 한 모금 마시면 천년을 살 것 같은 기분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들이 내가 자란 곳이라니...
내 유년의 꿈이 고스란이 스려있는 그 곳에서 나는 다시 꿈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