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가다 (이탈리아, 스위스)
나폴리
어쩌면 그렇게 여유로운지 바다에는 배 한 척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같으면 바닷가에 횟집이 즐비하고 바다에는 고깃배가 통통거릴 텐데... 이태리 사람들은 생선을 먹지 않나? 아니 폼페이에서 분명히 해물 스파게티를 먹었다. 또 하나 사람 사는 집은 많은데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유럽 사람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라 가족 위주의 삶을 지향하다 보니 남자든 여자든 퇴근 후엔 집으로 가서 가사 분담을 함께 하며 가족적 분위기를 즐긴단다. 웅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둘만 모이면 모임을 만들어서 외유 지향적인 우리의 정서와는 다른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 할 즈음 세계 3대 미향으로 불리는 나폴리에 도착했다. 3대 미향으로 불리며 영광을 누렸던 나폴리는 쇠락하는 가난한 도시로 전략해 가고 있다고 한다. 온후한 기후에 사람들은 게을러져 이태리 사람들은 북부에서 벌어서 남부를 먹여 살린다며 나폴리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한다. 나폴리는 옛 영광을 추억하며 이태리의 천덕꾸러기로 전략하고 있다. 아직도 도시는 고즈넉하니 바닷가에 자리한 너무나 아름답건만... 나폴리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드리 헵번 주연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면서 감성에 접는다. 로마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콜로세움. 바티칸 시국. 트래비 분수. 포로로마노. 카이사르를 추억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2006년1월20일
베네치아
로마에서 베네치아까지는 7시간이나 소요되는 장거리 코스였다. 그래서 새벽부터 서둘러 아침 7시에 출발을 하였다. 내 연모하던 연인을 로마에 두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려니 아쉬움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 같다. 버스는 어느새 로마를 벗으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북으로 올라갈수록 날씨는 추워져 길가의 가로수가 하얗게 설화를 피우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은 하얗게 설화를 피운 체 아직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유럽인들은 포도주를 천상의 술이라 일컬으며 주신 디오니소스를 경배하는 것도 알만했다. 그들의 포도주는 지방마다 특색을 달리하며 예쁘게 포장되어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진열되어 있었다. 난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예쁘게 포장된걸 보니 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다고나 할까. 여행 일주일이 지나자 일행들은 지쳐서 잠에 빠졌다. 나는 내 앞에 열려있는 멋진 세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쏟아지는 잠을 쫓느라 안간힘을 썼다. 긴 시간 스위스에서 로마로 그리고 스위스 취리히까지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운전기사 막스 밀러 씨께 감사한다. 막스는 착하고 예술인 같이 멋있는 남자였다. 조금은 나를 설레게 하는 하는 가끔은 보고 싶을 것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긴 여정 끝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안개가 도시에 내려앉아 추운 날씨와 더불어 베네치아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더했다. 베네치아로 들어가려면 오직 배로만 들어갈 수 있다. 베네치아는 바다 위에 세워진 도시라 수로를 따라 이동이 가능하다. 맞은편 집을 찿아갈 때도 택시배를 타야 된다.그래서 택시도. 앰블런서도 배란다. 바다위에 웅장한 건물들이 지어졌다는 것이 대단한 역사였다.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격찬했다는 산 마르코 광장 건물마다 역사가 천년은 기본이고 오백 년은 건물역사에 끼지도 못한다고 한다. 밤이 되니 산 마르코 광장에 불이 켜지고 가로등도 잠에서 막 깨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도시를 밝히고 있다. 까스등처럼 희미한 가로등은 영화 "레미제라블"을 연상하게 하였다. 12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성 마르코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산 마르코 성당은 단순하면서도 극도의 절제된 예술로써 황금으로만 장식한 우아한 건축물이었다. 그리고 장엄하고 엄숙한 기운이 그 넓은 공간에 넘치고 있음을 느꼈다.
베네치아는 품위가 있고 고급스러움이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다. 파리에서도 로마에서도 볼 수 없는 기품이 쇼윈도마다 빛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상업의 도시다. 그래서 상점마다 상품이 넘치고 겨울이 무러 나고 봄이 시작되려는 시기라 명품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50. 60% 나 세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현지 가이드를 잘 못 만난 탓으로 아무 데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일행들의 불만을 아량곳 하지 않고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따라 시내 관광을 나섰다. 수로는 우리들의 골목과 같아서 대문 앞에 배를 닺도록 되어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다리를 놓아 오갈 수 있게끔 했다. 죄수들이 다가올 고문과 죽음을 생각하며 한숨 지었다는 탄식의 다리를 곤돌라를 타고 지나면서 난 과거는 그저 지나간 역사일 뿐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따라 이집저집 대문 앞을 지날 때 불 켜진 창문을 통해 춥고 배고픔의 느끼며 그 시간 성냥팔이 여인이 따로 없구나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안개로 쌓인 도시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희미한 가로등은 애수를 느끼게 한다. 현지 가이드의 불친절로 우리는 베네치아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 큰 수상도시의 작은 점 하나 찍고 온 거나 다름없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베네치아는 크리스털로 유명한 도시인데 기념품 하나 제대로 사지 못했다. 우리는 지정된 공예품 가게 가는 것보다 자유로운 쇼핑을 원했다. 일행은 강제로 타고 온 배로 태워져 베네치아를 떠나와야 했다.
아! 베네치아 머지않은 시간에 꼭 다시 오리라.
아직도 나는 베네치아를 잊지 못하고 언젠가 꼭 다시 가리라 다짐하며 아쉬움을 꾹꾹 눌러 마음 한편에 고이 접어 놓는다. 어느새 이번 여행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오늘 밤이 지나면 스위스 루째른으로 다시 들어간다. 파리에서 시작해 스위스. 로마로 그리고 로마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면 일정이 느긋하고 피로하지도 않을텐데 로마에서 비행기를 타는것 보다 스위스에서 비행기를 타면 티켓값이 절반이나 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태리를 한 바뀌 돌고 다시 북으로 올라와서 스위스 루째른으로 들어 간다.
2006년 1월 22일
루째른
베네치아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루째른으로 올라가며 아름다운 요들송을 들으면서 루째른은 어떤 도시일까 기대를 해 본다.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두어 시간마다 휴게소에 들러 쉬어 갔다. 특이한 것은 휴게소마다 만물상 같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팔고 있었고 웃기는 건 그기서도 모자나 장난감은 made in china 가 수두룩 했고 물을 샀는데 탄산이 들어 있어 순 물질. 오직 물만 마시는 우리에게 익숙지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no탄산 water를 사야 하는 거였다. 또 하나 유럽의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어면서 한 번도 여권을 제시하거나 한 적이 없다. EU 공동체가 결성되면서 마치 한 나라처럼 논스톱 패스. 예를 들면 이태리 사람이 스위스에 가서 스키를 타고 프랑스에 가서 쇼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겐 국경이란 낯선 단어처럼 들리는 듯했다. 나는 너무나 부러워서 죽을 뻔했다.
그런데 스위스만 유일하게 EU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국으로 남아 독자적으로 부국을 이루면서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현명한 판단이 부러울 뿐이다. 스위스는 시계와 맥가이버 칼로 유명하다. 루째른에 도착한 우리는 점심을 먹고 "빈사의 사자상"을 보았는데 나라를 구하다가 화살에 맞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모습은 가슴이 짠했다. 우리는 자유 시간을 이용해 루째른 시내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쇼윈도에 예쁜 게 있으면 들어가서 사들고 나오거나 가격이 맞지 않을 경우엔 실컷 만져보고 나오기도 하면서 즐겼다. 치즈와 쵸코렛을 사서 먹기도 하고 근처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시간들을 아쉬워하며 기념사진도 찍어 보았다.
자유시간이 끝나고 저녁을 먹고 취리히 공항으로 이동했다.
취히리 공항에서 저녁 9시 30분발 대한항공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면 다음날 오후 4시 30분이란다. 우리 대한항공을 타니까 반갑고 편안했다. 집으로 돌아옴을 실감하며 식사로 나온 비빔밥을 먹으면서 그동안 먹었던 스파게티. 스테이크. 중국식 메뉴들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 작은아이 훈이가 경대 건축과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어리광만 피운다고 생각했는데 대견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꼭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다시 한번 가고 싶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건강하게 무사히 잘 다녀와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