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아우슈비츠 그리고 크라카우)
2011년 5월 23일
크라카우 근교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일찍 슬픔의 도시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갔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떠올리며 오시비엥침 마을에 도착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 걸려 있는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위선적인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가이드를 따라 전시물이 있는 수용동으로 가면서 전기 철조망을 보며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슬픔이 찾아들었다. 수용소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희생된 그들의 슬픈 사연들을...
희생된 유태인의 사연을 담고 있는 많은 수용동에는 참혹한 증거자료가 가득 채워져 있다. 세계사를 통해 몇 장의 사진과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의 슬픔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수용자들이 들고 들어 왔다는 여행용 가방, 독일군은 가방을 잠시 맡기는 것이라며 가방에다 이름을 크게 적게 만들며 안심시켜 놓고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기만했다. 그런 가방들이 수용소 방 한 칸을 가득 채웠다. 다른 수용동에는 그들이 신고 온 신발이 가득하다. 당시 유태인들은 비교적 부유하게 살아 신발이 하나 같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멋쟁이 하이힐과 샌들이다. 지금 내다 놓아도 유행이나 품질이 뒤처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것을 보며 그들의 삶을 짐작해 본다. 그러나 신발의 주인들은 수용소에서 한 달을 다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죽거나 독가스에 희생되고 말았다. 또 다른 수용동에는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으로 가득 찼다. 당시에 가발을 만들거나 옷을 짜기 위해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을 다 밀었기 때문이다. 그 머리카락을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나치는 떠나고 오늘날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모두 은발이라 의문이 들었다. 유태인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독가스를 마시게 되면 중독되어 머리카락이 은색이 되었다고 한다. 독가스는 비소가 대량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 수용자들이 사용했던 식기 도구와 빗, 구둣솔 등 헤아리기 어려운 많은 품목이 수용동 마다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아기들과 어린아이의 유품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배냇저고리를 보면서 나치의 적나라하고 비참한 물증들이 인간이 어찌 이렇게 까지 독할 수 있을까 고개를 흔들어 본다. 일행은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너무나 큰 슬픔 앞에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직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수용자를 매단 긴 단두대, 독가스실의 매캐하고 음습한 분위기 그 무게에 짓눌려 구토를 했다. 독가스로 죽이고 그 주검에서 금니와 머리카락마저 절취했다니 가증스러운 만행은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되어 다시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수용소에 갇혀있을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오월 햇살아래 들려왔다. 나치의 잔인성과 탐욕이 곳곳에 스며있는 수용소를 나서면서 나는 왜 여기를 왔을까 처음으로 후회를 해본다.
독일군은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말고도 제2수용소 브제진카, 제3수용소 모노비체가 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은 유태인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군 포로와 폴란드의 지식인 등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함께 죽어갔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 일본 관광객은 들어갈 수가 없었단다. 그러나 요즘은 개인적으로 아우슈비츠를 간혹 방문하기도 한단다.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질렀던 만행 역시 참혹했다. 전후 독일은 사과와 보상을 했지만 일본은 아직도 사과는커녕 망언을 일삼고 있다. 일본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하여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고 그런 후 좋은 이웃 나라로서 미래를 함께 하길 바라본다.
아름다운 계절 오월에 지나간 역사의 뒤안길에서 가슴을 해이는 슬픔에 태연하게 밤을 먹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밥맛이 떨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점심은 폴란드 전통음식 플라츠키가 나왔다. 감자전을 말라서 그 안에 쇠고기를 갈아서 넣은 것이었다. 가이드의 말이 처음엔 자기도 밥을 못 먹었지만 다 먹고살자고 하는 근데.. 라며 그냥 잊어버리고 먹게 되더라고 하더니 조금 전 비참함의 역사는 잊고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쓴웃음을 지어본다.
식당에 들어서기 전 일행 중에 누군가 민들레 홀씨를 받아 싸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큰 소리로 버리세요, 가져가면 안 돼요. 왜냐면 외래종을 우리나라에 들여가면 토종의 멸종을 부를 수 있고 또한 외래종 퇴치 자금으로 우리의 세금이 엄청나게 투입될 겁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부연 설명까지 하니까 그 사람은 무식함이 드러나 부끄러운지 내게 잘 낫다고 하면서 못 마땅해한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런 상식이하의 행동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생각에 동의했다.
점심을 먹고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크라카우로 이동했다.
크라카우는 16세기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다가 이후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겼다.
크라카우 구시가지 중앙시장 광장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휴일을 맞아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소년 소녀들이 아프리카 기아 돕기 바자회를 열고 모금을 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모금함에 코인 몇 개를 넣어 주었다. 중앙시장은 중세로부터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폴란드에서 1차 2차 대전에도 파괴되지 않은 도시다. 중앙광장 우뚝 서 있는 르네상스양식 직물회관 건물은 길이가 100m나 된다고 한다. 지금은 직물보다는 폴란드의 공예품과 호박으로 만든 액세서리 등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광장 가장자리에 노천카페가 즐비하고 한편에는 관광객을 태우기 위한 마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마차를 타고 시내를 구경하고 싶은데 시간이 허용하지 않았다.
크라카우 중세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멋진 도시였다. 바르샤바 대신 크라카우를 들리게 되어 영광이다. 바르샤바는 공산주의 시절 당시 소련의 원조를 얻어 시가지가 콘크리트 건물이 멋없이 빼곡한 볼품없는 도시로 변했다는 걸 책을 통해서 본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크라카우 중세의 멋스러움을 영원히 간직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