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한 접시
딸기 한 접시를 담아서 엄마한테 갔다 드렸다. 평소에 당뇨 때문에 고생을 하는지라 당도가 높은 과일은 드린다는 생각을 안 했다. 그냥 우리끼리만 먹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근데 어제도 오렌지랑 딸기를 사 와서 남편이랑 둘이서 먹다 보니 갑자기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엄마가 생각났다. 한집에 살면서도 끼니를 따로 하다 보니 딴 집처럼 느끼곤 했다.
아침에 딸기 한 접시를 담아서 엄마한테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가 과일을 잘 먹나. 너희나 먹지"라고 하셨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나만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며 가슴 아파하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50년도 훌쩍 지난 옛날, 집과 논밭 서른 마지기를 정리한 우리의 전재산 8800? 88000? 인가를 친정에 홀랑 빌려주고 한 푼도 못 받아서 우리가 집도 없이 공부도 못하고 고생한 거 때문에 나는 가끔 내 인생을 엄마가 망쳤다고 퍼붓곤 했다. 그 돈은 우리 가족의 터전을 친가인 의령에서 외가인 합천으로 이주하기 위한 자금이었다. 당시 외가는 천석꾼에서 막 기울기 시작한 시점이라 큰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화폐 가치가 일전, 이전할 때이니 엄청난 큰돈이었다. 아버지의 부제로 엄마는 참 마음고생 몸고생을 많이 하셨다. 세상에서 제일 가엽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억울해서 성질을 있는 대로 엄마한테 부린다. 팔순이 넘어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가끔 심통을 부린다. 그럴 때면 엄마는 자리를 슬쩍 비껴버리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뒤늦은 후회처럼 느껴진다. 반세기도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뭐 하지만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가끔 찾아오기 때문이기도 한다.
울 엄마는 돈에 욕심이 없는 것 같다. 돈이 조금 생기면 우리 아이들 용돈으로 다 주고 내가 급히 돈 쓸 일이 생기면 큰돈을 선뜻 내어주시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그 많음 전 재산을 외할아버지께 다 빌려 드렸을 것이다. 다 지난 이야기지만 가끔 이렇게 속상하기도 하다.
엄마는 늘 부지런하시다. 지병인 고혈압, 당뇨에다 허리는 꼬부랑 할머닌데도 쉬지를 않으신다. 그래서 지병을 갖고 살아도 잘 조절하며 나름 건강하게 잘 지내신다. 이런 울 엄마한테 육십이 코 앞인 철부지는 가끔 패악질을 부리는 못된 딸이다. 이런 나를 위로하며 살고 있는 울 엄마다.
딸기는 비교적 당이 적어서 드셔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때, 맛있는 딸기는 이미 내 입안에서 달디달게 식도를 따라 넘어가고 있었다. 나쁜 딸, 누가 딸이 아들보다 낫다고 했을까.
언제나 내 자식이 먼저고 엄마의 차례는 순번에 끼지도 않았다. 여유 있을 때, 그리고 생각이 날 때였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내가 이러나 싶다가도 바쁜 일상에 묻혀 울 엄마는 그저 잘 지내고 계신다고 생각해 버린다. 자식은 곧은 백 살이 되어도 철부지라더니 내가 그 맞잡이다. 꼬부랑 할머니라 걸음이 시원찮다고 따뜻한 봄날이 되어도 꽃구경 한 번 못 시켜 드리는 불효막심한 딸이다.
오늘 딸기 한 접시에 엄마를 향한 내 마음이 뒤숭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