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에는 비가 자주 내려서 못에 물이 가득 차야 한 해 곡식이 잘된다는 도연명의 시조 한 자락이 생각나는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다. 한참 동안 자판을 두드려 보지 않았었다. 나이 들수록 기존에 하던 것들이 손에서 생각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예전 같으면 미묘한 감정 차이에도 미주알 고주알 하고 싶던 것들이 이제는 그저 무디어진다.
그동안 나에게도 집안에도 제법 일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큰아이 영권이의 결혼 날짜를 받았고 그래서 상견례도 마쳤다. 사돈 될 사람들이 서울사람 같지 않게 순해 보이고 순수해 보여서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쓰이고 그냥 편안한 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어 준다. 시간이 되면 예식장에 가면 된다라는 생각 외엔 딱히 할 일이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거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들 둘이서 알아서 잘하니까 부모는 돈 말고는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게 요즘의 세태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영권이의 결혼식도 있지만 나도 직장을 옮겼다. 자격증을 따고 취직하면서 3년을 다녔던 곳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새직장으로 출근한 지 어느새 한 달이 되어간다. 새로운 직장은 꽤나 마음에 든다. 환경도 깨끗하고 하는 일도 저번보다는 훨씬 수월하고 연차도 더 많으니까 잘 옮겼다 싶다. 아직 익숙하기까지 한 달은 지나야 되겠지만 내 시간이 많이 여유로워졌다. 적응기는 끝나고 동료들과 잘 어울려 열심히 하면 여기서 몇 년을 하고 직장 마무리를 할 생각이다. 나이가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일이란 능력이 되면 할 수야 있지만 지금 생각은 그렇다.
요 며칠 사이 기온이 올라가더니 이팝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 옛날 어느 배고픈 이의 눈에 이팝 나누 꽃이 밥그릇에 소복한 쌀밥 같이 보여서 이 밥나무 꽃이라고도 한다는데 소복소복한 꽃송이가 하얀 쌀밥처럼 예쁘다. 봄이면 이팝나무 하얀 꽃을 보면서 얼마나 설레고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직장에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팝나무 꽃은 예전의 그 설렘이 아니라 정형화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느낌이다. 내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들던 그 느낌이 아닌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무디어진 감성 탓일까 하고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 집에는 오월말까지 남편이랑 둘이다. 작은 아이가 대구에서 대학원을 하면서 취직을 했는데 서울 출장을 갔다. 우리랑 3년을 같이 살겠다고 해서 정말 좋았다. 나이 들어도 자식과 함께 산다는 것은 신나고 반갑기만 하다. 대학원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 참 섭섭할 거 같다.
봄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나는 콜레스톨이 높다는 이유로 달콤한 믹서커피 대신 원두커피 한 잔을 내려 깊은 쓴 맛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