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불안함에 잠들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후다닥 지나고나니 꿈만 같다. 23일 입원해서 24일 수술을 했다. 이제는 한 숨 돌리고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생각보다 암세포도 크지 않았고 수술도 잘 되었다고 담당의의 말씀이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와 조용히 쉬고 있다. 병원에서 느꼈지만 정말 안타까운 사연들이 너무 많았다. 정말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몽선습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부질없이 혼자 바빠 어쩔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부질없이 바쁘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 모른다. 요즘 집에서 쉬면서 가까운 월광 수변공원에 산책을 나간다. 깊어진 가을은 호수에 가을을 드리우고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듯 너무나 여유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호숫가 억새도 은빛을 호수에 뿌리고 있었다. 청둥오리는 가족을 대동하고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가을을 쫓아 교태를 부리듯 한다. 멀리 울긋불긋한 산. 그리고 내가 앉은 벤치앞에 서 있는 단풍은 발갛게 물들어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멋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들이 마치 한 폭의 잘 그려진 풍경화가 다름아니다.
세상은 이렇듯 아름다운걸 나는 미처 몰랐다. 가을에 취해 자꾸만 미소가 배시시 지어진다.
내속에 찌들었던 욕망들이 하나 둘씩 녹아 내림을 나는 느낀다. 누가 나를 이렇게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있겠는가. 오직 자연만이 내 끝없는 욕망을 잠재우고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답다.
내 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아름답고 산책나온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아름답다.
단풍 하나를 주워서 들여다 본다. 단풍 한 잎에서 봄의 여림을 보고 짙은 여름의 뜨거웠던 시간도 느껴 본다. 봄과 여름을 지탱해주던 엽록소의 소멸이 가져다준 빨강색의 아름다움이 내게 감동을 가져다 주다니...
나는 호수를 따라 천천히 걸어 본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본다.
아!
나는 행복하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가을이 아름다워 행복하고. 내가 살아 있음에 행복하고.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이 아름다워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