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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케치

가을 동창회

by 하이디_jung 2012. 10. 24.

 

짚방석 내지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 산챌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조선시대 한석봉 선생의 시 한 수입니다. 가을 그리고 중년의 풍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낭만적인 시조입니다. 우리 나이에 꼭 어울릴만한 시라 괜히 이 가을 오늘 같은 밤에 한 번 쯤 풍류에 젖어 친구들과 한 잔 술에 취하고 싶어 억지를 부려봅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하늘에선 금방 잉크가 뚝뚝 떨어 질 것 같고, 들판에선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하는 곡식과 과실들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축복 속에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세상은 가을로 참 아름답습니다.

작년 이맘 때 부산에서 하룻밤 추억을 만들었는데 어느새 만남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흐르는 물은 가둘 수는 있지만 세월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습니다.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마치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결코 말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나이도 이제 환갑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있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나이가 이 가을과 닮았습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마지막 불꽃처럼 아름다움을 태우듯 우리 오십대가 그런 나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이 오면 대나무 숲에서 댓잎들의 몸 비비는 소리에도 잠을 설치게 되겠지요. 참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살아 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모두 좋은 벗들로 남아서 서로 이해하고 다독이며 좋은 일에 함께하고 슬픈 일에는 눈물 닦아 주며 위로하는 친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인연 중에서도 유년을 함께한 친구들 보다 좋은 인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초딩 친구를 모습에서 내 유년이 떠오르고 시린 추억이 덩달아 떠오르기도 하지요. 굳이 추억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아이 앞에 서면 주마등처럼 옛 이야기가 시가 되기도 하지요. 얼마 전 대구 여자 친구들은 일본에 이어 중국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녀도 우리 친구들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은 없었습니다. 초딩 친구처럼 만만하고 부담 없는 사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세월에 밀려 어느 날 사라지는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십년 이십년 후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웅다웅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41회 친구들은 다 좋은 마음으로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며 서운한 점이 있더라도 다수의 마음에 박수 보내고 한 마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이가 들어 보니까 가장 좋은 것이 보편성이란 걸 알았습니다. 일 프로의 개성도 중요하지만 우리 나이에는 보편적인 것이 최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이제 남은 시간 누구에게나 좋은 벗들이 되어 주지 않겠는지요. 친구를 가리켜 조선시대에는 벗이라 불렀고 구한말 근대에서는 동무라고 불렀으며 오늘 날 현대에서는 친구라고 합니다. 문헌을 뒤져보지 않아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입니다. 동무는 어감이 유아적인 면이 있고 친구는 만만하고 친밀감이 있어 좋지만 마지막으로 벗은 깊은 사유를 함께 할 수 있고 은근한 정이 죽음까지도 나눌 수 있는 사이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친구보다 벗으로 부르는 걸 참 좋아합니다. 벗을 대할 때는 절제된 행동과 품위 있는 말이 어울리지요. 하여 친구라지만 함부로 하지 않고 점잖은 언행으로 나이든 만큼 품격 있는 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보시게들,

깊은 가을밤 우리 함께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켜켜이 쌓았다가 훗날 육신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날 보석처럼 꺼내어 희미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게 서로 사랑하는, 기쁨이 충만 하는 우리가 되어봅시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에 꼭 어울리는 시조 한 수 들려 드리며 마치고자 합니다. 조선시대 조존성이란 분의 “오늘도 좋은 날이요” 입니다.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것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이셔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놔이 좋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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